진주성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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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역사진주성이야기연혁

진주성이야기_연혁

백제(?) ~ 1379년
진주성은 본래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백제 때는 거열성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1591년 ~ 1593년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진주성내 촉석루 근처에는 한때 경상우병영과 경상도관찰사가 경상북도관찰사와 경상남도관찰사로 나뉘자 경상남도관찰사부의 부청 소재지였다.
1604년 ~ 1896년
1604년(선조 37년)에는 경상남도 마산 합포에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진주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집무를 보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어 조선의 군제가 신식 군대로 개편될 때까지 경상우병영의 청사 소재지였다. 또한 촉석루와 그 주변 지역은 과거 시험 또는 생원시, 진사시, 경상우도 지역의 향시를 시행하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선조 37년) 마산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으로 정식 개정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상북도 관찰사와 경상남도 관찰사로 나뉘면서 경상남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관찰사부는 촉석루와 함께 한국 전쟁 중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
1905년 ~ 현재
1905년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박중양이 진주 판관으로 부임, 민병성이 후임 군수로 부임하는 2월 20일까지 진주군수 서리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1925년까지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 토지국은 진영 못을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충당해 버렷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69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진주성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중건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을 복원하였다. 1979년 ~ 1984년까지 성내의 민가 751동을 보상비용을 주어 철거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성 외곽의 정비사업과 주변 시설 철거를 2000년까지 완료하고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을 중건하였다. 이후 사적 제 1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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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진흥과 축제담당 (055-880-2051)
  • 최종수정일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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